[한국 고대사] 칠지도(七支刀)에 관하여 (1)에 이어 칠지도의 후면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원문입니다.
뒷면: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聖音(晉),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 괄호() 안의 글자는 그 앞의 글자와 이견(異見)이 있는 글자입니다.
- 세모△ 는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입니다.
ex) △(供)이라고 되어 있으면, 판독 불가능으로 보는 분도 있고,
供(공)자로 해석하는 분도 있다는 의미
(3) 칠지도 뒷면 해석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聖音(晉)
선세이래 미유차도 백제왕세△(자) 기생성음(진)
-> 선세이래 이런 칼이 없었다. 백제왕세(자) 기생성음(진)이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고위왜왕지조 전△(시)후세
-> 일부러 왜왕 지를 위해 만드니, 후세에 전하라.
후면의 내용은 보다시피 칼을 만든 주체와 받는 이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당연히 그 상하관계와 관련하여 논쟁의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먼저 첫줄의 '백제왕세자'라는 부분은 칼을 만든 주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었습니다.
글자의 순서대로 평범하게 해석한다면 '기생성음'은 백제왕세자의 이름으로 보는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처음 제시된 것은 1962년 일본학자 三品影英에 의해서 입니다.
그는 '寄生(기생)'을 백제왕세자의 이름으로, '성음(聖音)' 을 왕자에 대한 경칭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이병도는 1974년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백제왕세자 기생성음을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왕으로 보는 견해를 내놓습니다.
이 견해는 칠지도를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의 유물로 보는 연구자들에 의해 꾸준히 지지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칠지도의 생성 연대에 대해서는 명확한 정설이 없는 만큼, 누구라고 확정짓기 보다는
'백제왕세자 기생성음'이라는 있는 그대로 해석해 두는 편이 최선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다음 문장에서 '故'의 해석은 '일부러'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선세 이래로 이런 칼을 만든 적이 없었다'고 앞문장에서 밝히고 있는데,
이때에 와서 백제왕세자가 왜왕을 위해 '일부러'만들었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후세까지 전해(傳) 보여주라(示)고 문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倭王旨'부분이 문제가 될수 있는데, 이것 역시 글자 순서대로 해석하면
왜왕 '旨'가 되어서 이 '旨'는 왜왕의 이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백제왕세자' 다음의 '기생성음'을 백제왕세자의 이름으로 해석한 것과 똑같은 맥락입니다.
여기까지가 현재 우리학계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입니다. 요약하면
'이런 칼을 만든적이 없는데 백제왕세자 기생성음이 왜왕 지를 위해 일부러 만들었으니,
후세에 잘 전하라'
가 되겠군요.
상하관계를 파악하기 어려운 문장입니다만, 왕이 아닌 왕세자가 왜왕과 대등한 입장 내지는 상위에 있는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서 우리나라의 우위를 주장하는 분들은 이부분을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20세기 초, 제국주의 일본의 치하에서 칠지도를 연구했던 일본학자들은 이런 해석보다는
보다 자신들의 조선 점유를 합리화 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이 문구가 해석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한 해석이 현재까지 힘을 지니고 있지는 못하지만,
일본학자들에 의해 위의 해석에 대한 의문은 끊임없이 제기되었습니다.
'寄生聖音'의 해석을 의미 그대로 해석하는 견해가 1970년 栗原朋信에 의해 제기되었습니다.
'寄生'이란 단어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기대어 살다'가 됩니다. (넵, 기생충의 그 기생 맞습니다 -.-)
그러면 '聖音에 기대어 살다'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한편 '백제왕세자'를 '백제왕'과 '세자'로 따로 해석하는 견해가 1968년 板元義種에 의해 제기되었습니다.
한국과 일본 고대사서에서 왕의 아들을 가리키는 표현은 '王世子'라는 표현보다는
'世子', '王子'의 표기가 일반적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따라서 백제왕세자는 백제왕과 세자를 아우르는 칭호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백제왕세자'를 책봉한 기사가 중국측 사서인 晉書에서 발견되어 설득력은 떨어집니다)
위 두 견해를 종합해 보면 후면의 첫 문장은 '백제왕과 세자가 성음에 기대어 살았다'가 됩니다.
'聖音(성음)'이란 곧 '聖恩(성은)'으로 '임금의 은혜'이므로
백제왕과 세자가 성은에 기대어 국가를 유지했단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聖恩의 주체는 그 다음 문장에서 드러납니다.
'故'는 대개 이유나 원인을 설명하는 뜻으로 쓰이는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다면
'따라서 왜왕의 뜻(旨)을 받들기 위해 만들었다' 고 두번째 문장을 해석 할 수 있습니다.
'旨'를 왜왕의 이름으로 보지 않고, 왜왕의 '뜻'으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결국 전체적인 문장은
'선세이래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의 왕과 세자가 성은에 기대어 나라를 유지하였던 고로
왜왕의 뜻을 받들기 위해 만들었다'
가 됩니다.
해석상의 큰 무리는 없지만, 우리나라의 견해와는 상하관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
국가간의 공식표현에 '寄生'이라는 직접적인 비하표현이 쓰인 것은 부자연스럽다거나,
백제왕세자는 있는 그대로 '왕세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습니다.
이러한 한문 해석상의 문제는 결국 이 유물의 연대와 그 생성당시 정치적 역학관계를 알지 못하는 이상
공론에 빠지기 쉽습니다.
따라서 연대 판명도 이루어지지 않은 현제 상황에서는 더이상 해석상의 문제로 논쟁은 일어나지 않는 편입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개인적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견해를 판단해서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후면에서 생각보다 중요한 점은 '선세(先世)이래 이런 칼이 없었다'는 문장입니다.
백제와 왜의 상하관계가 어떻게 해석되든 '칠지도'는 백제와 왜의 관계가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이 문구대로라면, 이전까지는 백제와 왜가 칠지도를 주고받을 만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칠지도가 만들어진 시기는 백제가 왜가 처음 교류를 시작한 시점, 내지는
이전과는 비교할수 없을 만큼 백제 혹은 왜가 서로에게 필요한 시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연대비정과 관련해서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습니다.
※ 칠지도 해석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논의들
이상으로 아직도 칠지도가 언제, 어떻게 어디서 만들어졌는가 라는 기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백제와 왜의 상하관계 - 소위 헌상이냐 하사냐와 관련하여 분명히 인식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적어도 '칠지도 명문내에서는 딱히 백제나 왜, 한쪽을 미화하거나 격상시킨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 는 점입니다.
백제의 왕자는 '백제왕세자'로 표현되어 있으며 왜의 왕은 그대로 '왜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것은 있는 백제의 왕자를 미화했거나, 왜의 왕을 비하한 표현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적은, 객관적 표현에 가깝습니다.
양국의 상하관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표현은
칠지도 앞면 명문에 '후왕(侯王)'이란 단어가 거의 유일한데
아직 백제의 '후왕제(侯王制)'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하는 만큼
이것만으로 백제가 왜에 상위국이었다고 단정하기는 힘듭니다.
현재 한일 양국에서 헌상설도, 하사설도 압도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명문 내용에서 기인한 바가 큽니다.
애초에 헌상설과 하사설이 양존하고 있는 현상 자체가
명문 내용에서 백제, 왜 한쪽을 확실히 미화하고 있지 않기 때문임을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칠지도 명문 자체는 백제와 왜를 상당히 객관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초기의 많은 연구자들은 신공기(神功紀) 52년조의 기록과 칠지도의 외형이 일치함을 들어 별다른 비판없이
日本書紀의 기록에 나오는 칠지도와 현재 석상신궁(石上神宮)에 봉안된 칠지도를 동일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직 석상신궁의 칠지도가 어느 시기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칠지도의 제작시기에 대해서 5세기 후반 내지는 6세기 전반의 것일 가능성을 논하는 견해들이 있는가 하면,
(김석형, 1963,「三韓•三國의 日本列島內分國에 대하여」,『歷史科學』1호.,
宮崎市定, 1992,『 謎の七支刀-五世紀東アジアと日本-』
연민수, 1994, 「七支刀銘文の再檢討-年號の問題と製作年代を中心に-」, 『年報 朝鮮學 4』)
고고학적으로 보아 칠지도와 형태가 유사한 鐵製三叉鉾(철제삼차모), 有棘鐵器(유극철기) 등이
6세기 전반에 성행하였음을 밝힌 논고도 있습니다.
(村上英之助, 1978, 「考古學から見た七支刀の製作年代」, 『考古學硏究 25-3』)
칠지도와 같은 철제 무기가 이전까지 나타나고 있지 않음을 감안하면
고고학계의 이러한 지적은 의미심장합니다.
결국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칠지도와 현존하는 칠지도는
동일한 것이 아닐 가능성도 상당히 높은편입니다.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백제가 중국연호를 사용한 적이 없었음을 들어,
중국연호가 사용된 칠지도는 백제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주장마저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즉 칠지도는 日本書紀가 편찬된 8세기경 日本書紀의 기사를 근거로 누군가에 의해
백제가 왜의 속국임을 증명하기 위해 假作하였다는 것이 주요 논지였습니다.
그러나 이 위작설도 칠지도에 굳이 후왕(侯王)이라는 표현을 사용된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진 못했습니다.
결국 칠지도의 제작 연대 자체가 크게 후퇴될수 도 있다는 고고학적 정황 증거가 나타나자,
굳이 4, 5세기로 그 제작연대를 낮춰보거나 칠지도 내의 연호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큰 의미를 못가지게 되었고,
따라서 칠지도에 대한 연구가 답보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지금의 실정입니다.
중요한 점은 칠지도의 제작 이면에는 철을 매개로한
백제, 가야, 왜 사이의 교역관계가 엄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철은 고대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국가 무역 품목이었으며, 이것은 개인이 마음대로 교역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칠지도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백제와 왜가 철교역을 시작한 시점과 그 양상부터 밝혀내어야 합니다.
이것은 기존의 사료와 칠지도 명문 만으로는 풀어낼 수 없는 문제이며, 고고학적 연구성과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사료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유물증거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 칠지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